LOGIN
선생님들의 글
나를 달리게 하는 아름다운 열매들
KIDCA
2004.09.27 13:09
나를 달리게 하는 아름다운 열매들


미술교사 최은혜
  26년이란 세월의 날들을 살아오면서 불쑥 누군가가 제게,
  “아주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라고 물어온다면, 저는 자신 없는 표정으로 흐릿해진 추억들을 다 들추어내며 힘겹게 손가락으로 하나둘 꼽아 볼 테지요. 모두에게나 다 그렇듯이 행복은 항상 멀리 있는 것으로만 느끼니까요.
  하지만 인생의 전체적인 부분에서 느껴본 행복의 총 갑절만큼이나 큰 충격을 하루하루 체험하는 요즘입니다.

  미술 수업시간이 되어 선생님들께서 아이들을 미술실로 인도해 주시고, 아이들이 줄맞춰 들어오고 미술실 문이 닫히면, 그때부턴 마치 마법처럼 누구라도 보면 깜짝 놀랄 만큼 크레파스를 쥔 아이들의 손이 거침없이 뻗어 나갑니다. 구상화적인 사물로부터 추상적인 상상 속의 사물까지 아이들의 손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마치 끝도 없이 계속되는 노래와 같이 아름다운 리듬으로 아이들의 손이, 눈이, 입이, 귀가 온 집중력을 모아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완성해 나가고 저는 그 앞에서 마치 양파껍질처럼 겹겹이 쌓아놓았던 구습과 낡은 사고의 틀을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도 보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아이들은 뜨겁고 깊은 용광로와 같이 집중력과 온 정신을 불태워 자신들의 조그마한 세상과 같은 갖가지의 예술품들을 창조해 내는지, 얼마나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까닭 없는 대화 속에 진주처럼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보석들이 뚜욱 뚜욱 떨어지는지, 얼마나 서로의 작품 하나 하나들을 날카롭게 비교하며 예술적 호기심에 대응하기를 주저하거나 수줍어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표현하는지…….
  서너 살,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 작고 여려 보이는 우리의 아이들이 그 속에 하나씩의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끔씩 저는 그 큰 에너지에 과연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교사인가 한없이 무서워집니다.
  순수 그 자체인 우리 아이들과 그러한 깊은 예술적 교감을 매일 매일 체험할 수 있는 저야말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행운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달 전에 아이들과 ‘밤’ 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밤’ 에는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무얼 하는지, 무엇이 보이고 만져지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고 아이들이 그리는 그림을 지켜보았습니다.
  아이들은 대부분이 자신의 방안을 그렸습니다. 바퀴가 달려서 춤추는 침대, 노래하는 테디베어, 자신을 놀래키고 도망가고 있는 동생, 꿈에 나온 온갖 아름다운 장면들을 원색의 화려한 빛깔로 그리는 아이들을 보며 역동적이고도 기발한 각자의 방안풍경에 저는 속으로 적잖이 놀라며 너무나 흐뭇해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아이들이 그림 위를 새까만 색으로 다 뒤덮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의 예쁜 테디베어와 사탕과 과자, 아직도 눈에 선명한 우리아이들의 예쁜 그림이 까만색 크레파스의 횡포에 조각조각 나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에 전 다급하게 아이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까만색 칠을 하는 것일까?”
당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는 대답,
  “밤에는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보여요!”
  아! 저는 머리를 무언가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까맣게 온통 칠해진 그 도화지 속에 아직도 따듯하게 남아있는 온갖 사랑스러운 기억과 추억들이, 비록 보이지 않아도 아이들의 눈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추억의 밤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보이기 위한 거짓이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진실의 모습...
  아직도 종종 제 자신과 이런 문제로 싸우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나의 눈에 적당히 아름다워 보이는 그림으로 아이들을 이끌지 말고 정직하고 순수한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고 만족할 수 있는 진실된 그림으로 이끌자…….’
제일 쉬워 보이는 이 목표가 지금까지도 제게는 가장 어렵습니다.

  부족한 면이 많은 미완성체인 저를 우리 아이들은 서서히 다듬어 줍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한결같이 다정하고 친절하며 언제나 한결같이 정직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살아갑니다. 제게는 가장 완벽한 스승이지요.
  올바른 미술교육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고 외국에 짧은 기간 다녀오시면서도 귀한 미술재료를 한 짐 가득 가져다주시곤 하시는 원장선생님과 아이들을 눈물과 감동으로 사랑하여 그 마음 자체로도 제 눈엔 하나님이 지어주신 훌륭한 예술품들인 우리 KIDCA선생님들 또한 매일매일 저를 채찍질하여 지치지 않고 달리게 하는 귀한 스승입니다.
  이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Shadowy